당구와 골프 - 멘탈의 문제

작성자 : 관리자 작성일 : 2015-05-30 15:26:53 조회수 : 2838
스코틀랜드 해변에서 가난한 목동들의 놀이로 시작된 골프는
이제 상류층이 주로 즐기는 종목이 되었고,
그와 반대로 제국의 화려한 궁전에서 귀족의 놀이로 시작된 당구는
이제 일반대중이 가장 부담없이 즐기는 종목의 하나가 되었습니다.


골프를  '시작은 미약했으나 끝이 창대한'  경우라고 한다면
당구는  '저 높은 곳으로부터 낮은 곳으로 임한'  경우라고 해야겠네요.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발전했는지로는 이렇게 서로 반대의 길을 걸어왔지만, 당구와 골프는 사실 쌍둥이처럼 같은 유전자를 가진 종목입니다.
'정신과 육체의 결합'을 요구한다는 점에서 다른 스포츠들과 판이하게 다르며
또한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당구와 골프는 인간이 만든 스포츠의 으뜸이기도 합니다.


대다수의 다른 스포츠들은 주로 육체의 능력을 몇 개 잘 결합하면 됩니다.
잘 뛰고, 잘 던지고, 빠르게 반응하고, 강하게 휘두르고... 등등의 육체적 능력 중에서
몇 개를 짜임새있게 갖출 수 있으면 그 종목의 고수와 탑랭커도 될 수 있죠.


그러나 당구와 골프는 그렇지 않습니다.
육체적으로 아무리 능숙하게 훈련되어 있다 할지라도,
정신이 육체를 제대로 장악하고 지휘하지 못하면
아무 때라도 와르르 무너질 수 있는게 골프고 당구입니다.

정말 유별난 종목들이죠.
조금만 연습을 늦춰도 형편없이 망가지기 일쑤요,
심지어는 바로 5분전까지만 해도 아주 잘 되었었는데
고작 전화통화 한번 끝내는 사이에 마치 초보자처럼 엉망이 되기도 합니다.

정신이 육체적 능력을 완전히 제어하는 수준에 이르지 못한 모든 당구인과 골퍼들이
매일 매일 겪는 일이죠.

당구와 골프 두 종목의 아주 아주 별스럽고 괴팍한 특징입니다.


당구와 골프


정신력이 육체의 수행력을 온전히 지휘할 수 있어야 하는  '고품격 스포츠'





가업을 잘 이어가던 애틀란타의 변호사 바비 존스(Bobby Jones)가 왜 갑자기 골프에 헌신하게 되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대서양 양안을 오가며 온갖 힘든 일을 자진해서 다 겪게 만들었으며, 결국에는 골프의 성인으로 불리울 수 있을 정도의 업적까지 쌓게 이끌었을까요?  바로 골프의 유별난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청년 바비존스는 골프가 그냥 스포츠의 한 종목이 아니라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통합시킨 최고의 스포츠임을 제대로 간파했던거죠.





한국에서 출세가 보장된 KS마크, 경기고-서울대출신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던 청년 이상천을 당구에 전념하게 만든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무엇이 그로 하여금 열악한 환경을 이겨내게 만들었으며, 미국과 한국을 오가면서 3쿠션을 개척하게 하고,  사후에 한국당구 역사의 중추로 여겨질 정도의 업적을 쌓게 이끌었을까요?  바비존스의 경우와 같습니다.  바로 당구의 유별난 특성 때문이었습니다. 청년 이상천은 당구가 그냥 놀이의 한 종목에 불과한 게 아니라 그 본질에 있어서 인간의 정신과 육체를 완전히 통합시킨 최고의 스포츠임을 정확하게 간파했던 겁니다.



사람들은 멘탈과 마인드 이야기를 쉽게들 꺼내지만 이건 그렇게 호락호락한 분야가 아니다. 만일 스포츠의 멘탈을 관리한다는 게 누구라도 금방 이룩할 수 있는 경지에 불과하다면, 세상의 모든 선수들은 이미 마음먹은대로 척척 플레이하면서 매 이닝마다 하이런을 치고, 매 타석마다 홈런을 치고, 또한 매 라운드마다 이븐과 언더를 기록하고 있을 것이다.


멘탈은 어렵다. 모든 스포츠에서 다 어렵기도 하지만, 골프와 당구에서는 특히나 더 어렵다. 침착하자고 되뇌이며 스스로 다짐한다 해도 마음이 즉시 반응하여 차분해지거나 몸이 곧 유연해지지도 않으며, 그와 반대로 과감하게 도전해보자고 굳게 굳게 결심한다고 해서 마음에 잡념이 깨끗이 사라져주지도 않으며 몸이 매끄럽게 임무를 수행해주지도 않는다.

어렵다. 정말 어렵다. 이 경지는 몸과 마음이 완전히 맞물려 돌아가는 정교한 톱니바퀴처럼 일체가 되어야만 가능할텐데...  과연 어떻게 해야 몸과 마음은 온전하게 하나가 될 수 있을까.








우리 조상님들은 흔히들 '양반쇠'라고 부르던... 구리와 주석의 오묘한 합금으로 놋그릇 또는 유기라는 그릇을 만들어 쓰셨었다.


연탄이 보급된 후에 연탄가스의 독성에 반응하여 색상이 쉬이 변하는 특성과 당시로서는 새로운 재질이었던 소위 양은그릇에 비해 무게가 더 나가는 불편함 때문에 사람들에게 부당하게 오해받으며 서서히 외면당하고 말았던 이 놋쇠그릇은, 그 내막을 따지자면 사실은 전체 인류가 만들어냈던 소수의 놀라운 창조물 중 하나다.

오랜 세월동안 바로 옆에 붙어서 살아온 같은 동아시아문화권이면서도, 사기그릇을 주로 써왔던 중국이나 또는 나무그릇을 주로 사용했던 일본과 달리 우리 조상들은 특별하게도 '합금금속'으로 그릇을 만들어 썼다는 점도 흥미롭고...

비슷한 시기의 로마에서는 쉽게 만들기 위해서 납을 섞었다가, 서서히 몸에 누적된 납성분 때문에 결국 중독증세에 시달려야 했는데... 특이하게도 우리 조상님들은 오래 사용하면 할수록 오히려 장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도록 오직 구리와 주석으로만 합금했었다니, 그분들의 천재적 발상이 더욱 놀랍고 존경스럽기만 하다.

이 놋쇠를 만들 때의 문제는 구리와 주석의 배합비율이다. 구리 90%에 주석 10%의 비율로는 서로 잘 섞이면서 쉽게 합금이 되지만, 만일 여기에서 주석의 비율을 더 높이려하면 서로 잘 섞이지 않아 합금이 안되기 때문이다. 어떤 인터뷰에서 모대학의 재료공학과 교수가 단언했던 장면이 떠오른다.


구리 72%에 주석 28%로 합금했다고요? 그건 안되는겁니다. 구리와 주석의 분자구조때문에 그 비율로는 합금이 안되요. 되는 일이 아니라니까요. 기록이 뭔가 잘못된거에요.



그러나, 현대의 첨단 재료공학 전문가가 자신만만하게 단칼로 부정하는 그것을 우리의 조상님들은 이미 저 까마득히 먼 옛날부터 이뤄내셨었다. 굳이 이름을 붙여보자면 이른바  '강제합금'이라는 방식으로.


끝없이 두들기고 두들겨서 구리와 주석의 분자들이 서로 합체할 수밖에 없도록 강제하는 방식. 구리와 주석이 하나로 섞여 새로운 금속이 생길 때까지 끝장을 보도록 두들기는 방식. 그때까지 그저 한없이 한없이 계속 두드리는 방식.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것이, 세상에서 오직 우리 민족의 이동경로에서만 발견되고 있는 방짜유기다.






그래서 방짜유기는 망치로 두드려 맞은 저 울퉁불퉁한 흔적들이 흠이 되고 허물이 되는 게 아니라 그야말로 제대로 만든 명품이라는 강력한 증거가 된다.

저 까마득히 멀고 먼 청동기시대부터 우리 조상님들이 과연 어떻게 이 합금의 방법과 그렇게 만든 물건의 기적과도 같은 비밀을 모두 다 알게 되었는지 필자로서는 감히 짐작도 못하겠지만, 아무튼 이렇게 놀라운 방식으로 탄생한 우리의 놋그릇은...


음식이 금방 식지 않게 열을 보존하여 맛있는 식사를 하도록 도와줄 뿐 아니라, 치명적인 식중독 세균들을 그릇 자체의 능력만으로 완전살균하기까지 하며, 또한 마치 은숟가락처럼 음식에 섞인 농약성분들에게까지 즉각적으로 반응함으로써 사람들이 무심결에 독성물질을 먹지 않게 해주는 안전장치이기도 하다.



비록 한때의 성마른 사회분위기로 인해 연탄가스의 독성에 반응하는 장점이 되레 변색이 된다는 단점으로 부당하게 오해받음으로써 사람들로부터 구식물건일 뿐이라고 무시당하고 외면당하던 시절도 있었지만 말이다.




골프와 당구의 멘탈이 방짜유기의 합금과 닮았다.

아무리 봐도 도저히 서로 어울릴 수 없을 것들을 어떻게 해서건 하나로 바꿔야 한다는 점에서, 마치 우리 조상님들이 놋그릇을 만들던 과정과 꼭 빼닮았다.

이걸 뭐라고 해야 할까... 힌두교 파괴의 신 '시바'와 유지의 신 '비슈누'를 하나의 신으로 동시에 존재하도록 합체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코일링이 부족해서 바디턴을 더 주려는 것은 강한 의지를 필요로 한다.
임팩트 구간에서 가속의 탄력을 키우는 것도 굳센 돌파력을 요구한다.
당구에서 나쁜 옛습관을 버리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 것들은 파죽지세의 강인한 마인드가 없으면 해결할 수 없는 과제들이다. 강인함, 의지, 돌파력, 냉혹함과 무자비함의 마인드다. 당면한 현실을 부정하고 그것들을 산산이 파괴하려는 거친 집념이다.


스트록 내내 큐와 팔의 일체감을 유지하는 것은 침착함을 요구한다.
탑에서 다운으로 넘어가는 트랜지션은 무념의 여유가 있어야 한다.
클럽이 가속구간을 지날 때까지 팔로우축에는 확고한 인내심이 필요하다.



이런 것들은 자신의 샷과 스윙에 대한 따듯한 포용심 없이는 결코 풀어낼 수 없는 과제들이다. 침착함, 느긋함, 자애로움과 인내심의 마인드다.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면서 그것들의 자연스러운 흐름을 믿고 따르려는 마음이다.


부정하고 파괴하려는 강인함.   인정하고 지키려는 부드러움.

당구와 골프는 서로 정반대의 이런 마인드들이 함께 한 덩어리가 되기를 요구한다. 분자구조상 도저히 섞일 수 없는 것이었던 구리와 주석이 하나로 합쳐져 유기의 새로운 합금이 되고 좋은 놋그릇을 만들어내듯이, 마찬가지로 서로 어울리지 않는 두 마인드를 동시에 갖출 수 있어야 비로소 당구의 멘탈과 골프의 멘탈이라는 새로운 합금을 만들 수 있다. 그래야 박세리 최경주가 탄생하는 것이며 쿨르망 이상천이 될 수 있는 것이다. 당구와 골프의 멘탈은 그래서 어렵다.

서로 상극인 마음들을 한 곳에 모아 녹여 간직하고 있다가

필요한 때에는 각각의 마음을 상황에 맞게 꺼내 쓸 수 있어야 한다.

자신의 정신에 대하여, 진정한 주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따라서 당구와 골프의 멘탈은 모두 섞여 너와 나의 구별이 없어지는 'Melting Pot' 이기도 하면서 또한 합체하고도 각각의 특성을 잃지 않고 그대로 간직하는 'Salad Bowl' 이기도 해야 한다.

나의 당구를 높이고 나의 골프를 개척하는 여행에서 만나는 어떤 난관에 대해서는, 마치 침대의 길이에 맞춰서 사람을 늘이거나 쪼그려 죽이던 프로크루스테스처럼 스스로도 어처구니가 없을 정도의 무대포 억지도 부릴줄 알아야 하고,

또 어떤 면에 대해서는, '내 시신을 땅에 묻으면 벌레가 먹을 것이요 들에 내놓으면 새가 먹을 것이니, 땅에 사는 벌레만 위하지 말고 내 시신을 들에 내놓는게 어떻겠느냐'고 제자들을 타일렀다던, 저 유유자적하고 여유만만한 동양철학의 스승 장자와 노자를 닮을 줄도 알아야 하는 것이다.

이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냥 쉬운 일이 아닌 정도에 그치는게 아니라, 거의 대다수에게 있어서는 심지어 단 한번이라도 그 맛을 보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는 영역이다.




사정이 이러하기 때문에... 온갖 우여곡절을 이겨내고 마침내 경지에 오른 선수의 멘탈은 이 어울리지 않는 상극의 마인드들을 끝내 하나로 모아 새롭게 합금하는 길을 찾아냈다는 분명한 증거가 된다.


그 마음의 합금을 만드는 사이에 이루 셀 수 없이 많은 시련이 있었을 것이고, 희망보다는 좌절이 그 여정의 곳곳에서 그들의 마음을 깊게 할퀴고 베었을 것이며,  조개살을 벤 상처가 결국 진주를 낳듯이 마찬가지로 그런 상처들을 통해 맺히고 다져진 멘탈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을 이루어 낸 선수들의 멘탈 하나하나는 모두 쇠를 녹이고 달구며 두드리기를 수없이 거듭하여 탄생한 명품 놋그릇과 같다.

당구와 골프의 마인드에 대해 아래와 같이 평하며 맺는다 해도 그리 과한 표현은 아닐 것이다.

경지에 오른 선수의 멘탈은, 하나하나 모두가 명품이다.